문화유산

종묘

여정의 길 2016. 8. 25. 01:23



종 묘 역사

1392 년 (태조 1년) 태조 이성계 조선 건국, 4대 조상에게 존호를 올림.

1395 년 (태조 4년) 종묘 창건, 신실 7칸 좌우 익실 각각 2칸 규모로 정전을 세움.

1421 년 (세종 3년) 별묘인 영녕전 건립, 신실 4칸 좌우익실 각각 1칸.

1546 년 (명종 1년) 정전 4칸 늘려 총 11칸 규모.

1592 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탐.

1608 년  (광해 즉위) 정전 11칸, 영녕전 10칸 규모로 다시 세움.

1667 년 (현종 8년) 영녕전 늘려 총 12칸 규모.

1726 년 (영조 2년) 정전 4칸 늘려 총 15칸 규모.

1836 년 (현종 2년) 정전 4칸 늘려 총 19칸, 영년전 4칸 늘려 총 16칸 규모.

1995 년 종묘, 세계유네스코 등재.

2001 년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



조선 왕실의 사당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궁궐의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단을 두어야한다. 는 주례에 따라 경북궁의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의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08년에 중건한 것이다. 건립 후 신주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수차례 건물 규모를 늘려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정전과 영녕전이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정전을 종묘라 하였으나, 현재는 정전과 영녕전을 모두 합쳐 종묘라 부른다.

정전의 신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를 ,영녕전의 신실 16칸에는 34위의 신주를 모셨다.

왕위에서 쫒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종묘에 모시지 않았지만,

왕위에서 쫒겨났다가 숙종 때 명예를 회복한 단종의 신주는 영녕전에 모셨다.


종묘는 제사를 모시는 공간과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나뉜다.

제사를 모시는 공간으로는 정전, 영녕전, 공신당, 칠사당이 있고,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는 재궁, 향대청, 악공청, 전사청 등이 있다.

종묘의 모든 건물은 장식과 기교를 절제하여 단조로워 보이지만, 이는 존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위한 의도적인 장치이다.

중국이나 배트남과 달리 한국의 종묘는 건물과 더불어 제례와 제례악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종묘제례 및 종묘 제례악은 2001년에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되었다.


종묘제례

宗廟祭禮


국가 치대 규모의 제사

종묘제례는 유고 예법에 맟추어 신을 맞는 절차. 신을 즐겁게 하는 절차. 신을 보내드리는 절차로 구분하여 종묘 제례악에 맟추어 행한다. 조선시대의 종묘제례는 왕이 친히 행하는 가장 격식이 높고 큰 제사로서 밤중에 지냈으며, 왕을 비롯한 왕세자,여러 제관,문무백관 등이

참가 하였다. 그러나 왕이 직접 지내는 친행을 못 하면 영의정 등 대신이 올리는 섭행을 하기도 하였다. 종묘 제례는 정전에서는 각 계절의

첫 달과 음력 12월에 좋은 날을 정하여 일년에 다섯번 지냈고, 영녕전에서는 봄.가을에 두 번 봉행 하였다.

지금은 5월 첫째 일요일에 봉행하고 있다.

일반시민도 참여가능하다. 궁금하거나 환상적인 제례를 경험하고 싶으면 참여를 하자.


종묘제례악

宗廟祭禮樂


종묘제례악은 악기 . 노래 . 춤을 갗추고 종묘제례 의식에 맟추어 연행하는 음악이다.악기의 연주에 맟추어 졸아가신 왕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를 부르며 제례의식을 위한 춤을 춘다.종묘제례악은 1447년에 세종이 처음 만들었고,세조 때 이르러 제례악에 걸맞도록

보태평 11곡과 정대업 11곡으로 줄이고 다듬어 사용하였다. 보태평의 곡들은 역대 왕들의 문덕을 . 정간  왕과 백성을 한데 결속시켜주고,

후손에게 한없는 복을 내려 나라가 창성하게 해줄 것을 기원하는 내용이 간절하게 표현돼 있다.


아름답고 장엄한 인류무형문화유산


종묘제례악은  연주 위치와 악기 편성에 따라 등가와 헌가로 나뉘는데, 상월대에 배치되는 등가는 노랫말이 있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이고,

하월대에 배치되는 헌가는 노랫말이 없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이나, 현재 종묘제례는 등가,헌가 모두 노랫말이 있다.

화려하고 시원한 음색과 아름답고 장대한 음률은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중간 중간에 울리는 서슬 퍼헌 박 소리는

종묘제례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종묘제례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 1호호 지정되어있다.


종묘제례를 올리기 전에 행해지는것들



1. 향대청 일원

    香大廳


종묘제례를 위한 준비실

향대청은 제사 전날 왕이 종묘제례에 사용하기 위해 친히 내린 향.축문.폐백과 같은 제사 예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향대청 앞에는 행각이 길게 자리 잡고 있어 두 건물 사이에 남북으로 긴 뜰이 만들어졌다. 향대청 앞에는 동남쪽으로 망묘루(望廟樓)가

있고, 그 뒤쪽에 공민왕 신당이 있다. 툇마루 앞에는 신발 벗는 섬돌을 길게 설치해 여러 사람이 드나들기 편하게 했다.


2. 재궁 일원

    齋宮


제를 위해 심신을 정결히 하던 곳

재궁은 왕이 머물면서 세자와 함께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으로. 어제실.세자재실. 어목욕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당을 중심으로 북쪽에 왕이 머무르는 어재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무는 세자재실, 서쪽에 어목욕청이 있고, 담으로 둘러져있다.
왕과 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제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서협문으로 나와서 정전과 영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3.정전 일원

    正殿



역대 왕실의 신주를 모신곳

 정전은 왕과 왕비의 승하 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에 그 신주를 옮겨 와 모시는 건물로.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된다.

정전의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 곳에 있다. 남문은 신문(神門)으로,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다. 동문으로는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고 서문으로는 악공, 춤을 추는 일무원, 종사원이 출입한다.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제위 중인 왕의 4대 조상, 역대 왕 중에서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셨다.정전은 내부에 모실 신주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옆으로 중축하여 늘렸다. 건물 앞에 있는 가로 109m, 세로 69m나 되는 넒은 월대는 정전의 품위와 장중함을 잘 나타낸다. 월대 가운데 에는 신문에서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남북으로 나 있다.

재관과 짐례관들은 월대에 도열하여 제례를 행한다. 신실의 양쪽에는 창고와 부속실들을 마련했다.거친 월대 바닥과 위로 육중한 지붕을

떠 받치고 있는 모습은 숭고하고 고전적인 건축미의 극치를 이룬다.정전은 국보 제 2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종묘를 들어가면 입구에서 부터는 작게 보이고 점점 들어가면서 가이드분의 설명의 따라 보고 그냥

그렇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곳에 이런 기능을 담당했고, 이런 순서로 진행되는 과정을 들으며, 진행하던중 정전을 보고 뭔가

알수없는 것들이 가슴에 소용돌이치는걸 느끼게 해준 웅대하고 큰 기류가 흐른다.

예전에 지리산을 올라갈때 너무 힘들고 좋다 좋다 하다가

대천봉에 올라갔을때 느낀 자연의 위대함과 거대함을 이곳 정전에서 다시 느낀점이 놀라웠다.

수치상으로 106미터 69미터지만 안가보신분들이라면 꼭! 가보시길 권장한다.

어마어마한 기운이 느껴진다."



4. 영녕전 일원

   永寧殿


왕실 신주를 모신 별묘

1421년(세종 3 년)에 정종의 신주를 정전에 모시며 정전의 신실이 부족하자 정전에 모시고 있던 신주를 다른 곳에 옮겨 모시기 위해

새로지은 별묘다. 그 이름은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영녕전은 신주를 정전에서 옮겨 왔다는 뜻에서 조묘(祖廟)라고도 한다.시설과 공간 형식은 정전일원과 유사하지만 정전보다 규모가 작고 좀 더 친근감 있게 지어졌다. 정전 일원과 마찬가지로 이중으로 된 월대 주위에 담장을 주르고 동.남.서 세 곳에 문을 두었다.

가운데 4칸은 태조의 4대 조상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비를 모신곳으로 다른 협실보다 지붕이 높다. 좌우에 협실 각각 6칸에는 정전

에서 옮겨 온 왕과 왕비 및 추존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5. 전사청 일원

     典祀廳 


제례용 음식을 조리하던 곳

전사청은 제례를 치를 때 음식을 마련하는 곳으로, 평소에는 제사에 사용하는 집기들을 보관하였다. 네모난 마당 둘레에 'ㅁ' 자 모양으로

건물이 들어섰고, 마당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돌절구들이 남아 있다.1395년 (태조 4년)에 종묘를 지을 때 함께 지었는데.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8년에 재건했다. 정전 동문 옆의 수복방은 종묘를 지키는 수복들이 사용하던 곳이며, 그 앞에 찬막단과 성생위가 있다.전사청

동쪽에는 제사에 쓰는 우물인 제정이 있다.제정 주위에는 담을 쌓아 사람들이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신 로


신로는 종묘제례 의식을 위해 낸것으로 신(神)만이 다니는 길을 말한다.

종묘에는 신로 외에도 신향로,향로,어로,세자로 등이 있다.


탐방기를 적을 요량으로 사진도 찍고, 준비도 하였지만, 조선건국 부터 지켜져 내려온 역사이며 우리의 뿌리를 둔 엄숙한 곳임을 느꼇고,

정전 일원을 보고난뒤에 묵직하게 울림이 있었다.

입구 매표소에서 표를 살때 안내책자도 판매한다 금액은 500원 이다. 그 안내책자에 나온 내용을 적어보았다.

탐방기 쓰다가 혹여 실수하면 안될거 같았다 . 그래서 안내책자를 보고 적어보았다.

9월에 종묘 행사에 참석해보고 싶다.

여러분도 참석 가능하니 조선시대 태조 부터 지켜 내려온 우리의 고유 문화인 종묘제례악을 눈으로 담아보자.


한가지 아쉬운점이 있는데 문화재청에 민원을 넣을 내용이다.


아래 사진을 보자.



공중 전화가 있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 외국인들을 위한 도구인지 왜 이런 물건이 종묘에 있는것인지. 알수가 없다.


박스를 만들거면 우리식대로 만들어서 박스를 만들고 그안에 전화를 넣던가 하면 더좋지않을가? 꼭 필요하다면 말이다.


꼭 필요한것이 아니라면 치우는게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조선 500년중에 임진왜란때 유실 되었다 치더라도 500년간 우리 조상들이 자리하고 있던 곳인데 문화재청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율곡로도 지금 덮고 복원 사업을 하는 마당에 큰 것만 해결하려 하지말고 작은것 부터 해결하는게 좋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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