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

김구 대한민국의 김구선생님을 어디까지 아시나요?

여정의 길 2016. 8. 29. 17:02


김구선생님을 어디까지 아시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임시정부 주석 그리고 독립운동을 위해 나라에 헌신하신 분으로 알고있습니다.


위인전도 읽어보고했지만,  시간이 지난뒤 다시 찾아보니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시대가 조금씩 변화하고 우리들의 삶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지식 수준 생활수준이 높아지는데 나라의대한 수준은

아직 풀리지않은 수수께끼들 처럼 얽히고 섥혀 있는 지금 시점에서 일제강점기를 생각하면 비통함과 분노가 몰아치는데요.

그래서 저 또한 글을 보거나 관심을 가지려고하면 비통함에 혹은 분노에 견디지못하고 관심을 접어두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직도 나라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과 정상적인 상황이라는 생각이 내면에서 부딕치며 혼란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종교인, 교육자, 통일운동가, 정치인이다.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몰락 양반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했으며 이후 개신교에 귀의하였다.

자(字)는 연하(蓮下),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김두래, 장진, 장진구라는 예명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을 얻은 승려였으며,

신민회에서 활동하면서 기독교신자가 되었다.[5] 천주교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구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이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 임시정부 내 노선갈등 이후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를 이탈하고, 만주 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녔으며,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朴喜光)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에게서 받은 정치 자금을 사회주의자들에게 운반하던 김립을 암살했고,

자신의 부하였다가 사이가 틀어진 안공근의 암살 배후 의혹을 받기도 한다. 해방 후에도 존 하지, 브루스 커밍스 등에 의해

송진우의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으며, 송진우 암살 직후 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경고를 받기도 했다.

1947년 12월 장덕수 암살 사건 때는 현장에서 한국독립당원이 검거되면서 재판정에 서기도 했다.


1948년에는 반(反) 이승만 쿠데타 기도 의혹을 받기도 했다. 또한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 하려다가 실패하였으며

이것이 미 군정의 첩보에 입수되기도 했다. 김구는 극우 백색테러단체 백의사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이에 따라 해방정국의 혼란기에서 백의사가 자행한 각종 테러 사건과의 연관성 역시 의심받고 있다.



김구(金九)


생애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
출생지 조선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평동 경교장
별명 초명 창암, 자는 연하, 창수, 호는 백범, 연상, 법명 원종,

다른 이름은 김두래, 김두호, 장진구
복무 한국 광복군
최종 계급 광복군 대원수(통수권자)
지휘 한국 광복군 통수부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기타 이력 독립운동가, 승려, 교육자, 정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주석



출생과 가계 (1876 ~ 1949)

김구는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에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基洞)에서 (구)안동 김씨 김순영(金淳永, 당시 24세),

현풍곽씨 곽양식(郭陽植)의 딸 곽낙원 (당시 17세) 부부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7대 독자로 알려져 왔으나 그의 아버지 김순영은

4형제였고 할아버지 김만묵, 증조부 김영원에게도 각각 형제가 있었다.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김은열(金殷說)의 둘째 아들인 평장사 김숙승(金叔承)의 31대손이다.


충렬공 김방경의 25대손이며 익원공 김사형의 21대손이었다. 김자점의 11대 방계 후손으로, 김자점의 옥 당시

그의 11대조로 사과(司果)를 지낸 김대충(金大忠)이 화를 피하여 가족을 이끌고 개성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해주로 피신해 왔다.

해주군 서쪽 80리에 있는 백운방 텃골, 팔봉산(八峰山) 양가봉(楊哥峰) 아래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구의 선조들은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하여 양반의 신분을 숨기고 상민으로 행세하여 연명해왔다.

생계를 위해 군역전(軍役田)을 짓게 되었고, 그의 회고에 의하면 이때부터 ‘상놈’의 패를 아주 차게 되었다 한다.

이렇게 되자 텃골 근방의 양반이던 덕수 이씨와 진주 강씨 일족에게 대대로 천대를 받게 되었다.


김구의 회고에 의하면 '우리 집안의 처녀가 강씨, 이씨 문중으로 출가하는 것은 영광이지만 두 문중의 처녀가

우리 집안으로 시집오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라 하였다. 그러나 김구의 7대조 할아버지인 김언함(金彦喊)의

부인이 진주강씨인 경우도 더러 있었다. 상민이었던 가계는 김구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었고 이를 탈피하기 위해

소년기의 창수로 하여금 과거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광복 이후의 김구의 가계를 소개한 것은

경순왕의 후손임을 강조했는데, 1947년 도왜실기의 한국어 번역판의 서문을 쓴 이승만은 그가 명문의 후손 임을 강조했고,

안재홍(安在鴻)도 김구가 암살된 직후인 1949년 8월에 쓴 백범김구선생약사(白凡金九先生略史)의 서두에서 선생의

본관은 안동이니 그 선조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후예라고 기술하였다.

김만묵(金萬默)의 둘째 아들로 24세의 미혼이었던 아버지 김순영은 그의 누이동생의 시누이(매제의 자매)가 되는

장연군 목감방(牧甘坊) 문산촌(文山村) 출신 현풍곽씨의 딸을 삼각혼이라는 방법으로 결혼하여 아내로 맞이했다 한다.


태어날 무렵 난산이었던 탓에 일가의 권유로 그가 태어나던날 밤 그의 아버지는 지붕위로 올라가 소울음 소리를 흉내낸 끝에

순산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가 태어나던 날은 그의 조모가 사망한 날이었다. 그의 초명은 김창암(金昌巖)이었다.

아버지 김순영은 학식은 없었으나 이씨, 강씨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눕혔기에 해주감영을 제집 드나들 듯 하였다.


그를 두려워한 양반들은 그를 존위로 천거했다가 도존위로 승진시켰으나, 가난한 자들에게는 잘하고 양반들에게는 엄하게 대하였다.

하위 감투를 썼음에도 양반들에게 굴하지 않자 양반들은 아버지 김순영에게 공금흠포죄(公金欠逋罪)를 씌워 바로 해고해 버렸다.


김구 3부자왼쪽이 첫째 인仁, 오른쪽이 신信 이다. (1943년)

백범김구사진자료집


유년기에 그는 천연두를 앓았다. 이때 그의 모친이 예사 부스럼을 다스리듯이 죽침으로 고름을 짜 얼굴에 얽은 자국이 생겼다고 한다.

4세 때 백부 김백영(金伯永)의 상을 당하였고 5세 때 그의 집안은 강령으로 이사하였다가 그가 7세 때 황해도 해주군 본향으로 되돌아왔다.

아버지 숟가락을 부러뜨려 엿을 사 먹는 등 개구쟁이 행동으로 부모님의 꾸중을 들었다.

문중에 할아버지뻘 되는 친척 중 새로 혼인한 집이 있었는데, 이 친척 대부가 서울에 다녀오던 길에 자녀 결혼식에 쓸 갓을 샀다가

양반에게 빼앗기고 강제로 찢김을 당했다. 이 일로 몹시 충격을 받은 소년 창암은 과거 시험에 몰입하게 된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9세 때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웠으므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통감과 사략 등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통감, 사략, 병서, 대학, 당시(唐詩) 등을 두루 습득하였다. 이러한 학문실력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배움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베를 짜서 번 돈으로 김구를 가르친 덕분이었다.


황해도 산골에 숨어살던 그의 집안은 양반들의 학대를 참아가며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 김구는 평생의 한이던

상민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노력하였다.

한 번은 양반집의 아들들에게 심한 매질을 당하자 어린 창암 은 집에서 큰 부엌칼을 들고 그들을 찔러 죽이려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


1888년 4월 할아버지 김만묵(金萬默)이 사망했다. 이 무렵 김구의 아버지 김순영은 뇌졸중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시는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그의 부모는 문전걸식하면서 아버지의 병치료를 위한 고명한 의원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녔는데 이때 그는 큰어머니 댁·장연 재종조 누이 댁 등을 전전하였다.

이때 목동 노릇도 했지만 그는 학업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병은 차도를 보여 좀 불편하기는 해도

혼자서 걸을 수 있을 만큼 서서히 좋아졌고, 부모가 돌아오면서 그의 학업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이름있는 스승을 모실 수 없어, 큰어머니 정씨의 친정 6촌인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 부탁하여

무료로 통학하면서 글을 배우게 되었다.


17세에는 정문재의 권고로 임진년 경과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소년 김구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며 자신의 이름 대신

아버지 김순영의 이름으로 응시하였다. 이는 아버지가 과거에 합격하여 상민의 신분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 시험 중 양반이나 부자들이 돈을 주고 대신 다른 사람을 들여보내 대신 과거를 보게 하는 시험부정을 보고

분개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게 되었다.


과거 시험 당시 매관 매직의 타락상, 즉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파는 관리들의 비리를 보고 분노한 그는 서당 공부를 그만두고

3개월간 집안에서 두문불출하고 관상 공부를 하였는데, 당시 자신이 타고난 복은 없지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는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

이후 병서를 탐독하며 집안과 동리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도 하였다.

1893년 1월초, 그는 포동의 동학교도 오응선(吳膺善)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김창암(金昌巖)에서 김창수(金昌洙)로 개명하였고 입도 수개월 후 그의 휘하 신도(信徒)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 입교한 지 1년도 안돼 연비(신도)를 수백 명을 포덕하였으므로 이름이 알려져,

접주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상비방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1894년초 김구가 거느리던 연비의 조직이 급속하게 커져감에 따라

그는 18세의 나이로 수백 명의 수하를 거느리는 팔봉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3년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연비의 명부를 보고하라는

연락이 왔기 때문에 황해도에서 황해도 동학을 대표하여 직접 대도주를 찾아갈 접주 대표를 선발할 때 황해도 대표자로 선발되었다.


1894년 가을 최시형을 찾아가는 황해도 동학 대표자로 선발되어 연비 명단 보고차 충북 보은에 찾아가서 최시형을 만나고

접주 첩지를 받아왔다. 귀향길에 한성에서 동학농민군 거병소식을 접하였고, 같은해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해주

팔봉에서 거병하여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였다. 그의 부하는 700여 명이었으나 일본군 부대가 쏘는 총 소리에 놀라서 모두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 김창수의 부대는 조직 내 세력싸움에서 같은 동학군인 이동엽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해 12월 홍역을 치르는 와중에 이동엽 일파의 기습공격으로 김창수의 포수 부대는 패하고, 고열과 함께 홍역을 앓던

그는 몽금포로 피신하여 몽금포에서 하은당 스님의 치료를 받으며 3개월간 잠적해 있었다.

한편 김창수의 부대를 접수하려고 이동엽은 그의 최측근 영장 이종선(李鍾善)을 잡아 처형하였다.

아끼는 부하를 잃은 뒤 그는 이동엽을 묻어주고 안태훈을 찾아가게 되었다.


동학군 장수로 있을 때 안태훈(안중근의 부친)으로부터 귀순을 권유하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1895년(19세), 동학농민운동을 토벌하기 위해 의려소(義旅所)를 세워 경성의 김홍집 내각에 참여한

김종한의 원조와 황해 감사의 지도 아래 군대를 조직해 1894년 12월 접주 원용일의 부대 2,000여 명을 크게 이긴 적이 있을 정도로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던 지역 유력자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한다. 안태훈이 김구의 인품을 사랑하여,

동학이 패멸당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고 생각하여 비밀리에 밀사를 보내 불가침협정과 공동원조계획을 세웠는데,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하자 안태훈에게 의탁하게 된 것이다.


스승 후조 고능선


산채 은신과 고능선의 가르침 (1895~1896)

스승 후조 고능선
1895년 2월부터 안태훈의 배려로 안태훈의 신천군 청계동 산채에 몸을 의탁하였다. 안태훈은 그를 배려하여 1895년 2월

그의 부모까지 모셔다가 산채에 함께 살게 했으며, 무례하게 대하는 측근들을 혼내기도 하였다.

이 시기 안태훈의 장남 안중근을 처음 만났으나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태훈의 사랑에 들다 성리학자이자 화서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유학자 후조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감화받았는데,

그로부터 공맹의 학문, 성리학적 대의명분과 의리, 위정척사적 가르침을 받고 춘추대의와 의리에 눈뜨게 되었다.

고능선은 청년 김창수에게 나라가 제국주의 열강들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해있음을 말해주었다.

김구는 그 뒤에도 고능선 선생의 가르침을 추억하기도 하였다. 고능선은 화서학파로 이항로의 문인인 유중교의 제자이자

의병장 유인석의 동문이었으며 노론 계열이었다. 고능선은 청나라와 손잡고 왜적을 몰아내야 한다 하며 청나라로 갈 것을 권하였다.


20세에 청나라행을 결심, 청나라로 가기 전 안태훈의 사랑채에서 참빗장수를 만났다. 연령은 김구보다 8~9세 위로 전라북도

남원 출신 김형진(金亨鎭)으로 그를 만나 백두산까지 기행하였다. 청년 김창수는 김형진을 길동무로 삼아 청나라로 건너갈 계획을 세웠고,

백두산을 관람하고 만주를 돌아서 북경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만주 의병부대 활동 실패와 귀국
신천을 떠나 평양 을밀대와 모란봉에서 휴식하다가 강동 양덕 맹산을 거쳐 함경도로 넘어서 고원, 정평, 함흥에 도착했다. 함흥에

도착해서 함경도의 교육제도가 황해도나 평안도보다 발전된 것에 탄복하였다. 단천, 혜산진을 지나 백두산 참배는 위험하다 하여

중단하고 만주 통화(通化)로 갔다. 김이언을 만나기 전 청나라 장교를 만났는데, 중국어를 모르던 그는 종이에 한자로 써서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는 청일전쟁 당시 평양에서 전사한 청나라 장수 서옥생(徐玉生)의 아들로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러 왔다가 실패하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계속 불구대천의 원수임을 알리자 청나라 장수는 자신은 금주(錦州) 출신으로 집안에

5백명의 가병이 있으며, 청나라로 동행할 것을 권하였으나, 김이언을 찾는 것이 목적이라 정중히 사양하였다.

압록강 근방에서 만난 청나라 사람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여 김이언의 부대가 강계성을 습격할 때는

포수를 모으는 일과 강계성에 들어가 화약을 사 오는 일을 하였다. 화약을 사오던 길에 압록강에 얼음에 빠져 동사할 위기에 처했으나

동민들의 구조로 살아났다. 강계성 습격 시는 11월 압록강이 완전히 얼어붙을 때로 정하고 공략하기로 결정,

그와 함께 청나라군의 원조를 받아 강계성의 관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고 몸을 숨겼다.


강계성 아래에 몸을 숨겼다가 신천군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귀향하였는데 스승 고능선의 장남 고원명 내외가 병으로 요절하였으므로, 고능선은 김창수를 손녀사위로 삼아 의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의 스승인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을 결정하였으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하고 말았다.

1896년 2월 22일 안태훈은 해주군의 집사로 추정되는 인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순검들이 산포를 모아 청계동을 습격하려던

김창수(김구)를 추적했으나 김창수는 도망하고 말았으니, 자신도 김창수의 발자취를 사방으로 추적하고 있다”라고 보고하였다.


오영섭은 안태훈 자신이 청계동에서 김구를 일시적으로 보호했던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논란이 일어나자 신천군수의 징계를

피하기 위한 보신적 조치로 보았다.


치하포 사건과 수감 생활 (1896 ~ 1897)
21세였던 1896년 2월 청나라로 향했다가 단발정지령 시행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1896년 2월 하순 평안북도 안주에서

길을 돌려 고향으로 귀환하던 중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에서 진남포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 빙산을 만나면 그는 사람들과 함께 내려

빙산을 의지하여 작은 빙산을 떠미는 방법으로 배를 빼낸 뒤 우여곡절 끝에 치하포 인근 5리 밖의 강 어귀에 정박하였다.

치하포구의 한 여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관방에는 한복을 입고 성이 정씨이고 장연에 산다는 사람도 있었다.

김구는 그 사람이 진남포로 간다고 하였으며, 장연 출신이면서 경성말을 하고 흰 두루마기 밑에 칼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굳이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위장한 것은 평범한 상인이나 기술자가 아니라

을미사변의 공범이라 도피 중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한국인으로 변복한 것을 수상히 여긴

그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이거나 그의 일당으로 단정하였다.


김구는 아침 식사 시간에 밥값을 치르던 중 그를 습격하여 칼을 빼앗아 폭행한 뒤 살해했다.

그의 이름은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였다.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 군인이라고 기술하였으나,

일본 외무성 자료엔 쓰치다는 대마도 이즈하라 출신의 상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때 김완섭이 김구가 민간인을 살해했다 주장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은 자신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 조스케는 계림장업단 소속 상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1997년판에도 실려있는 내용이나 2002년도판에는 도진순 스스로 이 주장을 철회하여 계림장업단

관련 내용을 삭제하였으며 현재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었다는 것외에 계림장업단 소속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더불어 계림장업단이 치하포 사건 이후인 1896년 5월에 조직되어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언론인이자 전 국회의원 손세일도 자신의 저서 이승만과 김구 신판에서 쓰치다라는 이름의 그 일본인은

대마도 출신의 민간인에 불과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김구는 현장에서 살인 이유로 국모인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식당 주인이자 동장(洞長)인 이화보(李化甫)를

시켜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다.


쓰치다가 소지하고 있던 엽전 8백전 중 선주들에게 선가를 떼어주고 나머지는 방장인 이화보를 시켜 동리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

석달 후 자택에서 체포된 김구는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인천으로 압송되었다.

해주 감영에서 고문당하다가 인천 감리영으로 이감, 경무관 김윤정(金潤晶)은 그에게 일본인을 살해여부를 묻고,

이어 재물을 강탈할 목적이냐고 추궁하였다. 사태가 큰 사안이라 본 경무관 김윤정은 인천부윤 겸 감리사 이재정(李在正)에게 보고하였고,

이재정의 추국 때 군부의 원수를 갚기 전에는 몽백(상복)을 입지 않는 것인데,

국모의 원수도 갚지 못하고도 몽백을 입는 것의 염치없음을 질타하였다.


추국하던 관리들은 부끄러워하여 이후로 그에게 반말을 하지 않고 공대하였다.
김구는 감옥 속에서 간수가 준 <대학>, <세계역사>, <태서신사>, <세계지리>를 읽고 개화사상과 신학문에도 눈을 뜨게 되었으며,

감옥안의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쳐 감옥을 학교로 만들었다. 1897년 강화 사람 김주경(金周卿)은 그의 딱한 소식을 접하고,

동료 상인, 객주들과 함께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지만 실패하였는데, 가산을 탕진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잠복하였다.

뒤에 김구는 김주경의 동생 김진경을 찾아 그의 형 김주경의 행방을 수소문하나 만나지 못하였다.

감옥에서 김구는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김창수가 재소자에게 옥에서 글을 가르치면서 감옥이 서당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일부는 김창수에게 밥을 얻어먹을 목적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글공부에 참여하였다.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면서,

재소자들은 물론 억울한 일을 당한 간수들을 위한 대서(글을 대신 써줌)를 해주었고 또한 동료 재소자들로부터 민담과 노래를 배웠다.

이때 김구는 그의 재주를 안타깝게 여긴 간수의 소개로 서양의 책인 세계역사와 세계지리 등

중국에서 발간된 서적을 읽으면서 서양인들이 원숭이에서 얼마 멀지 않은 오랑캐라는 사고를 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서적을 통해 서양 문물을 접하였고, 향후에도 영어에 관해서는 문맹이었다 한다.


공주 마곡사


1898년 3월 동료죄수들과 탈옥에 성공한다. 그가 탈옥하자 그 대신 부모가 붙잡혀 투옥되었다.

탈옥 후 풀밭과 걸식, 민가에 숨어 생활하다가 삼남지방에서 도피하던 중 98년 가을께에 출가자인 공주 출신 이서방 이라는

남자를 따라 공주 마곡사에 도착했다. 먼저 삭발한 공주의 이서방이 찾아와 마곡사에 식객으로 유숙하던

그를 찾아와 "하은당은 이 절 안에 갑부인 보경(寶境)대사의 상좌이니 내가 하은당의 상좌만 되면

내가 공후하기에 학비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어서 삭발하기"를 권하였다

.

이후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하은당을 은사로 하고,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출가 초기부터 불경을 외우는 일과

법당의 허드렛일 도중 실수로 스승인 하은당과 다른 선임 승려들에게 질타를 당하였다.

다른 승려들은 보경당이나 하은당이 다 고령이라 이 분들이 작고하면 마곡사 법당의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라며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인의 확고한 결심에 의한 출가도 아니며 승려의 길에 뜻이 없었던 백범은 산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승려들과의 마찰 등으로 후회하던 중 이듬해인 1899년 봄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며 마곡사를 떠났다.

주지인 하은당은 뜻이 그러하다면 보내주겠다 하고 여비로 쓸 곡식을 주어 보내주었다.


이후 이곳저곳 방랑하며 동료 승려를 따라 평양부에 도착, 1899년 4월 동료 승려를 비밀리에 고향에 보냈다가

그를 따라온 부모와 상봉하였다. 식솔들을 이끌고 방랑중 5월 평양 영천암에 방장이 되어 방장으로 장발승려 생활을 하다가 환속한다.

그가 환속하자 실망한 동료 승려는 그를 떠났고, 1899년 가을 황해도 해주 본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작은아버지 김준영은 성실하게 농업에 종사하면 혼처를 마련해주겠노라며 농사일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이를 거절하고 얼마뒤 본향을 떠난다.


(1946년 11월, 강화 김주경의 집을 방문한 백범)


애국계몽운동 (1900 ~ 1910)
1900년 지인을 찾아 내려갔던 강화도에서 3개월간 훈장일을 한 것을 계기로, 고향인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2년 1월 할머니뻘 되는 일가 대부인의 소개로 그의 친정조카뻘인 최여옥(如玉)을

만나 맞선을 보고 약혼하였다.


이때 만난 우종서의 권유로 그는 탈상 후 자신의 일지에서 '예수의 도'로 묘사한 예수교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1903년 1월 약혼녀 여옥이 병사하였다. 김구는 홀로된 장모를 위로하고 예수교에 입교시켜 그리스도 신앙에 귀의케 하고 돌아왔다.

2월에는 부친상 3년상을 탈상하고 장로교와 더불어 한국 개신교의 상징적인 교회인 감리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소에서 최광옥(崔光玉)을 만났다.


그의 권유로 안신호(安信浩, 안창호의 누이)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하였다.

1903년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이다가, 백남훈(白南薰)에게 학교를 인계하고,

김구는 공립학교 교원이 되었다.[28] 1903년 여름에는 농상공부 종상위원(種桑委員)에 임명되었다.

이는 공립학교 교원직과 함께 그가 대한제국에서 맡은 유일한 관직이었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열린 을사조약반대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을 만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 모여 읍소를 하고, 종로에서 을사조약 반대에 대한 가두연설을 했다.


그러나 정부의 강제진압으로 저지당하였고, 이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 또한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여 나라를 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교육사업 등 계몽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돌아왔다.

1906년 종산군 서명의숙(西明義塾)의 교원(敎員)이 되었으며,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조직이자

비밀결사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황해도지부 총감(摠監)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를 맡았고, 재령 보강학교(保强學交) 학교장에 초빙되어 학교장직을 겸임하였다.

1904년 29세 때 최준례(崔遵禮)와 혼인하였다.

그는 최준례를 곧 경성 경신여학교에 입학시켰다.


수감 생활과 망명 준비 (1910 ~ 1919)
1910년 경성의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 회의가 열릴 때, 그는 신민회 황해도지부의 대표자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하였다.

1910년 12월 그를 방문한 안정근을 만났다가 1911년 안악사건에 연루,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형문을 받았고,

재판에서 종신형 선고 받고 수감되었다. 이때 서대문형무소에서 1911년 일제의 피체되어 2년 6개월의 형을 받은 김좌진과 조우하였다.


1912년에는 일본의 호적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재개명하고 호를 백범이라 정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


1914년 인천 감옥으로 이감되었으며, 죄수번호는 55호였다. 이어 서대문 감옥에 수감 도중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1915년 8월에 특별 가출옥하였다. 가출옥 직전 둘째딸 화경이 병으로 죽었는데, 출옥후 어머니 곽씨로부터 소식을 접했다.

가출옥후 그는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安新學校)로 갔다.

1916년 문화 궁궁농장 간검(看檢)에 취임했고, 셋째딸 은경(恩慶)이 태어났다. 1917년 2월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농민 계몽운동


지금 까지 김구의 유년기 청년기등 성장기를 알아보았는데요.

저도 처음보는 생소한것들중에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재밌는 사실은 김숙승의 31대손이며 중렬공 김방겸의 25대손 그리고 익원공 김사형의 21대손 이었다고하는데

조상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가요?


이 부분은 궁금합니다. 우리는 보통 일반적으로 누구누구 몇대손 이라고 칭하지 않나요? 

암튼, 신라 경순왕의 후손인건 사실인듯 하니 김구 선생님이 다시보이는군요.

다음편은 임시정부 와 독립운동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해보도록 하지요.



1920년 김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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