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

효명세자

여정의 길 2016. 8. 30. 12:17


비운의 왕세자 효종세자를 모티브로 나온 구르미 그린 달빛 이란 드라마의 효종역 박보검



문조 상상어진


문조(文祖) 또는 익종(翼宗, 1809년 9월 18일 (순조 9년 음력 8월 9일) ~ 1830년 6월 25일 (순조 30년 음력 5월 6일))은

헌종의 아버지로서 조선의 추존왕이고 대한제국의 추존황제이다. 자(字)는 덕인(德寅)이며 성은 이(李), 휘(諱)는 영(旲), 본관은 전주(全州)다.


1819년(순조 19년) 왕세자에 책봉됐고 1827년 부왕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했으나, 청정 4년만인 1830년 병사했다.

아들 헌종 즉위 후 익종으로 추존됐고, 고종이 그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자 황제로 추존됐다.


정식 시호는 문조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로 재위에

오르지 못한 추존왕임에도 불구하고 역대 조선 국왕중 가장 긴 시호를 가지고 있다.

세자 시절에 사망했으므로 흔히 효명세자(孝明世子)로 불린다.



효명세자는 1809년(순조 9) 순조와 순원왕후의 장자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다.

1812년 왕세자로 책봉돼 1817년 성균관에 입학했고 1819년 음력 10월 풍양 조씨(후일의 조대비)와 가례를 올렸다.

1827년에는 아버지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해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코자 했다.


이에 처가인 풍양 조씨와 다른 당파의 인물들을 중용하였으며 특히 이인좌의 난 이후 축출됐던 소론계열 인사까지 등용했다.

1828년에는 창덕궁 안에 사대부의 집을 본따 연경당(演慶堂)을 건립했다.

사대부들의 학구열을 궁 안에 도입하는 한 편, 부왕인 순조가 존호를 받는 행사를 치를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해 5월 창덕궁 대조전에서 사망한다. 불과 향년 22세였다.

그는 아들 헌종이 즉위 후 익종(翼宗)으로 추존됐으며, 헌종마저 자식없이 죽자 익종과 6촌이되는 철종이 왕위에 오르고 철종도 후사없이 죽자 헌종과 족보상 6촌형제이자 흥선대원군의 차남인 이명복이 입승대통해 고종으로 즉위한다.

대한제국 성립 이후인 1899년에는 양아들 고종에 의해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재추존됐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역 내 수릉(綏陵)이다.


1863년 신하들의 건의로 이듬해 홍운 성렬 선광 준상(洪運盛烈宣光濬祥)의 존호가 올려졌다.

1868년 11월에는 요흠 순공 우근 탕정(堯欽舜恭禹勤湯正)의 존호를, 1875년 11월에는 계천 건통 신훈 숙모(啓天建統神勳肅謨)의

존호가 더해지고, 1876년 11월에는 건대 곤후 광업 영조(乾大坤厚廣業永祚)의 존호가 추가되었다.

1878년에는 다시 장의 창륜 행건 배녕(莊義彰倫行健配寧)의 존호가 더해졌다.


기태 수유 희범 창희(基泰垂裕熙範昌禧), 1886년 11월에는 입경 형도 성헌 소장(立經亨道成獻昭章)의 존호가 더해져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

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

(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

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敦文顯武仁懿孝明大王)이 되었다.


이후 1900년 대한제국 수립 후 황제로 추존되면서 익황제가 되면서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

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

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가 되었다.


세자 책봉 초반에 사망하였으므로 후궁은 없다.

부왕 : 제23대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1790~1834)
모후 : 순원숙황후 김씨(純元肅皇后 金氏, 1789~1857)
왕비 : 신정익황후 조씨(神貞翼皇后 趙氏, 1808~1890)
장남 : 제24대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 1827~1849)
차남(양자) :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 1852년 ~ 1919년)
동생(養弟, 양동생) :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 1831년 ~ 1863년)

글과 춤을 좋아하여 직접 무용 춘앵전을 편곡하기도 하였으며 춤을 출 장소인 연경당(演慶堂)을 지었다.

이만큼 음악에 관심을 보인 조선의 왕 또는 세자는 세종과 세조 이후 유일하다. 조선에서 예악(禮樂) 곧 예의와 음악은

정치의 근본으로 여겨졌으며 정치의 기반을 다지려던 임금들은 예의 또는 음악에 관심을 쏟았다.


조선 전기의 세종과 세조 또한 그러하며 조선 후기의 효명세자, 곧 익종 또한 그렇다고 여겨진다.

다시 말해 왕권이 약해지던 조선 후기에 왕권의 기반을 다지려 음악에 관심을 쏟은 것이라 여겨지며 이러한 바를 높이 사

아버지 순조는 그의 죽음 뒤에 글월(文)로 옛적(古)을 드러냈다(示)해서 문호(文祜)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왕세자입학도첩(王世子入學圖帖)은 1817년(순조 17) 3월 11일 성균관에서 치러진 효명세자의 입학례를 기념한 화첩이다.

2010년 6월 17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07호로 지정되었다.

그의 초상화는 여러 점이 있었다. 헌종 때 그의 어진이 그려졌고, 고종 때 다시 그의 어진이 제작되었다.


현전하는 것은 고종 때 그려진 어진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중이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동란으로 불에 일부 탔다.

그러나 영정의 훼손이 심하고 얼굴 부분을 알아볼수 없어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현재 전하는 초상화로는 선원보략에 그려진 어진이 있다.

한편,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강목왕(康穆王)이나,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치 않았다.


구르미 그린 달빛 이란 드라마의 주인공은 효종을 모티브로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